체코 카를로비바리에서 프라하로 향하는 저녁 기차에 몸을 실었다. 프라하에서 머 물며 당일치기로 카를로비바리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카를로비바리는 보헤미아 지방의 중심지로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분수 모양의 수도꼭지에서 온천수가 흘러나왔고, 여행객들은 그 주위에 모여 도시 특유의 온천수를 담아 홀짝거리며 마셨다. 나는 구도시를 한 바퀴 돌며 도시의 뒷 산 전망대까지 올랐다. 전망대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니 중세 유럽 도시를 연상케 하는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객차에 앉아서 이미 어두워진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카를로비바리를 생각하다가 출출해져 서 식당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당칸에는 독서를 하는 중년 여성과 식사를 하는 나이 든 부부와 맥주를 마시는 터 키 사람(아마도)이 있었다. 나는 굴라시와 생맥주를 시켰다. 어두운 창밖을 보며 동유 럽 여행의 감상에 젖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식당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맥주 한 병을 사들고 바로 내 옆 식탁에 앉았다. 내 마음은 온통 그 사람에게 쏠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 그리로 쏠렸다. 바로 바라보기 민망해서 다른 데를 보는 척하며 흘끔흘끔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의 외모가 너무 특이했기 때문에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분명히 남자였다. 면도를 했지만 얼굴에 수염 자국은 선명했고, 다리에는 굵은 털이 숭숭 나 있었다. 좀 우락부락하게 생긴 얼굴과 건장한 체격으로 봐도 그는 분명 남 자였다. 헌데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는 소녀의 수줍음이 풍기고 있었다. 제법 커 보이는 가슴과 파마를 한 긴 머리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은 ‘나는 여자다’라고 항변하는 듯 했다. 허나 하얀 스타킹을 뚫고 나온 굵은 털 은 아무래도 그/그녀를 여자로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그/그녀의 몸에 밴 여성 스러운 몸짓을 보면 그녀 스스로는 분명 자신이 여성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식당칸 문을 열고 들어 와 바로 그/그녀 앞에 앉았다. 둘은 가볍게 볼을 맞대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그녀가 맥주 한 병을 사와 중년 여성에게 건넸다. 중년 여성의 등장이 내 호기심을 더욱 자극 했다. 도대체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 시선은 더 자주 그쪽으로 향했고,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말소리에 온 신경을 쏟았다. 처음에 그들은 차분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헌데 말소리가 점점 건조해지더니, 어느 순 간 그/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무언가 파국에 이른 것 같았고, 왠지 내 가슴 깊숙이 찔러 오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들이 내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그들은 그날 처음 만난 듯했다. 그 기차 식당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아닌가 짐작 된다. 처음에는 그 중년 여성이 성전환 상담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둘은 인터넷 카페 같은 데에서 만나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다 사랑이 싹튼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그녀는 트랜스젠더이면서 레즈비언이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 사는 셈이다. 그런데 이 중년 여성은 그/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그녀는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그/그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어라고 말을 건넸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녀는 마치 썰물이 져나가듯, 식당칸을 나갔다. 나는 생맥주 한 잔을 더 사서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 사이 식당칸에는 그/그녀와 나만 남았다. 그/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 며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 다. 그들의 사연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조 금도 모르면서, 순전히 나의 상상으로 그려 낸 그림을 보고 감상에 젖는 나 자신이 우습 기도 했지만, 희한하게도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만약 내 상상이 사실이라면 그/ 그녀의 운명은 너무나 잔인한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몸과 마음은 너무 부조화하였다는 것만으로도, 그/그녀의 운명은 충분히 잔인하지 않은가?

 다음날 프라하 구시가의 얀 후스 동상과 프라하 천문 시계 사이를 어슬렁대고 있었 다. 그런데 갑자기 알폰스 무하 박물관 쪽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프라하 퀴어 축제 ‘프라이드 페스티벌’이 열린 것이다. 이 축제는 매년 8월에 일주일 동안 프라하에서 열리는데, 2011년부터 시작 했다니 벌써 열세 번째 개최되는 셈이다. ‘No sexism, No racism, No homophobia, No transphobia, No violence’를 표방하고 있으 니 인종이나 폭력 반대 등을 포함한 전 지구의 평화를 위한 시위의 성격도 있지만, 그 중심은 성소수자들을 옹호하는 축제다. 거리 행진은 바츨라프 광장부터 시작해서 구 시가를 지나 레트나 공원까지 이루어진다.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의 봄’을 맞이한 곳 이니 그 의의가 더욱더 깊다.

▲ 무지개기: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여섯 가지 색으로 구성된 성소수자(LGBT) 공 동체를 상징하는 기(旗), LGBT는 성소수자 중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 젠더(Transgender)를 의미함.
▲ 무지개기: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여섯 가지 색으로 구성된 성소수자(LGBT) 공 동체를 상징하는 기(旗), LGBT는 성소수자 중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 젠더(Transgender)를 의미함.

 갑자기 쏟아진 인파는 긴 행렬을 이루었다. 나는 얼른 가까운 거리 식당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행렬에는 흑인, 황인, 백인 등 지구촌의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13년 만에 이 축제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진 모양이다. 이 축제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물감으로, 파스텔로, 크레파스로 볼에 무지개를 그렸다. 그들의 손에는 무지개를 그린 부채나 깃발이 쥐어있었다. 어떤 이는 덩실 덩실 춤을 추고, 또 어떤 이는 성적인 포즈 를 취하기도 했고, 여러 명이 커다란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이도 있었다. 직접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이도 있지만, 모두 마음만은 흥겹게 축제에 참여하는 듯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무지개가 떴다.

 문득 카를로비바리에서 프라하로 돌아오는 기차 식당칸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그녀 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그녀도 이 축제 어딘가에 있을까? 그/그녀의 얼굴에도 환한 무지개가 뜨길 바란다.

 

이 승 준(인문자연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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