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꾹 다문 입, 날카로운 코, 그 위에 걸쳐진 동그란 안경 뒤에는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깊은 눈이 있다. 깡마른 얼굴은 다소 선병질적이다. 섬세한 감수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의 사진이 그렇다. 그의 소설도 꼭 그의 사진처럼 선병질적이면서도 섬세하다. 거기에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사랑과 증오가 혼돈처럼 뒤얽혀 있는 세상을 대하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헤르만 헤세는 1877년 엄격한 독일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어머니 역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특히 그의 외할아버지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한 신학자이며 인도학자였다. 이러한 환경에 맞게 헤세도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그의 섬세한 감수성은 당시 신학교의 억압적 질서를 견디지 못한다. 헤세는 거기에서 탈출하여 신경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기도한다. 그 무렵 그는 작가가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수레바퀴 밑에서'에는 그 당시 헤세의 정신적 방황이 그대로 나타난다. 섬세하며 선병질적인 한스 기벤라트는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시인을 꿈꾸는 반항아인 동료 '헤르만 하일러'의 영향을 받아 예술과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눈뜨게 된다. 그는 결국 깊은 우울증으로 방황하다 술을 마시고 물에 빠져 죽고 만다. 한스는 억압적인 질서로 비유되는 수레바퀴에 희생되고 만 것일까? 헤세의 소설 전체를 두고 보면 한스의 죽음은 도리어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이후 헤세는 소설을 통해 죽는 날까지 예술과 자유를 추구하면서 온전히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구도의 여행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헤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 '데미안'에서 이러한 죽음의 절망에서 새롭게 태어나려는 헤세의 정신적 모험이 감행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두 세계의 균열을 경험하면서 세상의 진실에 눈뜨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밝고 경건한 세계다. 하지만 그 이면엔 하녀와 직공의 어둡고 음험한 세계가 있다. 하지만 두 세계는 질서정연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해결불능으로 얽혀 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신비로운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두 세계의 균열을 극복하고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아갈 힘을 얻는다.

여기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이 이끄는 길을 가야 한다는 주제가 강력히 제시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하고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것은 마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강조한 해야만 하는 의무의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자유의 삶을 연상케 한다. 선과 악을 초월하고 통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신 압락사스 역시 초인의 사상을 닮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미해결의 상태인 듯하다. 전쟁의 총성과 함께 맺어지는 결말은 모호하다.

하지만 '싯다르타'에 이르러서 헤세의 자기 세계에 대한 문학적 탐구는 어떤 해결점에 이르는 듯하다. 과거와 현재, 세상과 자아, 신성과 인간성은 조화롭게 통일될 수 있다. 그것은 논쟁을 통한 지식이나 사상이 아니다. 자연을 오감으로 느끼며 자신의 깊은 내면을 깨닫는 것이다. 평생 나룻배에 행인를 싣고 강을 오가는 평범해 보이는 뱃사공 바수데바, 그러면서 평생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온 그의 가르침이다. 헤세는 1946'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여기에서 그는 이상적인 세계를 꿈꾼다.

그러고 보면 혼돈의 세상에 조금씩 눈뜰 무렵 많은 젊은이들이 헤세에 매료되어, 그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또 성장해 간다. 청소년들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몸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성장을 멈추지만, 정신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성장한다. 넘어지고 후회하고 다시 일어나 깨달으면서……. 어찌 보면 삶의 길목마다 헤세가 서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청소년 시절 '수레바퀴 밑에서''데미안'을 읽으며 어른이 되었다. 그 신비주의가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카인과 아벨, 압락사스, 피스토리우스 등에 대한 이야기는 섬칫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특히 데미안의 이미지는 신비로운 마력이 있었다. 때때로 홀로 여행을 할 때면, '크눌프'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예전에 별반 인상깊게 읽지 않았던 '싯다르타'를 최근에 읽고서 헤세를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지금 내 삶의 길목에서 헤세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 때문에 석가모니의 얘기일 것이라 짐작하지 말기 바란다. 이 소설이 일종의 구도 소설이긴 하지만, 이는 평범한 사람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겪는 삶의 다양한 국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기도하다. 그래서 절실했다. '유리알 유희'는 여러번 시도했지만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 그 관념적 세계가 실감 나지 않았다. 유리알 유희라는 신비한 상상의 예술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그 실체를 짐작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스럽게도 올해 단풍은 유난히 아름답다. 하늘도 더 높고 푸르다. 바람도 시원하다. 그야말로 독서삼매경에 빠지기 좋은 가을이다. 이 가을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나도 올 가을엔 유리알 유희를 완독해 보련다. 이 깊은 가을날 헤세를 다시 한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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