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를 한 명 꼽으라면, 아마도 대개는 이중섭을 떠올릴 것이다. 혹 중섭을 모를지라도, 한국인이라면 그의 소 그림을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그의 힘찬 붓 터치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매료시킬 만하며, 예술에 대한 타오르는 열정과 애처롭고 처절한 삶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1956년 그는 40살의 나이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적십자병원 병실에 누워 외로이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헌데 중섭이 그렇게 가고, 그의 아내는 60여 년이 지나도록 그를 그리워하며 도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36년 이중섭은 예술의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의 제국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이듬해 문화학원에 입학한다. 문화학원은 니시무라 이사쿠라라는 진보적 자유주의 건축가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운 학교다. 그는 최후의 자유인이라 불릴 만큼 혁신적인 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교훈을 사랑과 증오로 삼았다. 1943년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가 투옥되면서 문화학원은 폐교된다.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학교 분위기와 무엇보다 개성을 존중하는 학풍이 중섭의 성격과 맞았다.

 1941년 중섭은 바로 그 문화학원에서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다. 마사코는 문화학원 2년 후배였다. 어느 날 우연히 중섭과 마사코는 단둘이 붓을 씻게 된다. 중섭은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진다. 평생 풀 수 없는 인연의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이다. 그때 다방에서 만나면, 중섭은 보를레르나 발레리, 릴케, 베를렌 등의 시를 암송으로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사랑은 점점 깊어졌다. 학교에는 루오(당시 중섭의 별명)와 마사코가 붙어 다니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둘은 헤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3년 여름, 중섭이 징병제 통보를 받고 귀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섭은 고아원에서 그림을 가르치며 징병을 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전쟁도 국경도 초월할 만큼 깊었던 모양이다. 194412월 중섭은 마사코에게 결혼이 급하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치고, 이듬해 3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마사코는 임시 연락선을 타고 사선을 넘어 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넌다. 둘은 원산에서 조선식 전통혼례를 치르고 부부가 된다. 중섭은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둘 사이에 세 아들이 생기지만, 첫째가 디프테리아로 죽어, 남은 형제가 태현과 태성이다.

 19458·15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섭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건너가게 된다. 제주도에 도착하여, 여비가 없어 3일 동안 눈 속을 걸어 서귀포 알자리 동산에 도착한다. 다행히 마을 반장 송태주 김복순 부부가 내준 1.4평 쪽방에서 기거할 수 있었다. 그 작은 방에서 네 식구가 굶주리며 7개월을 살아야 했지만, 중섭 가족은 그래도 그때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중섭은 아내 남덕의 손을 잡고 자구리해안을 걸었고, 태현과 태성 두 아들과 함께 게를 잡아 삶아 먹었다. 중섭은 그때 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 게에게 미안해서 게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섭 가족은 또 다른 시련을 맞는다. 195112월 중섭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간다. 남덕 부친의 부음이 전해지고, 게다가 아이들이 영양실조를 앓고 있어, 중섭은 남덕에게 일본에 돌아가길 권한다. 거기서 기다리면, 자신도 곧 따라가리라고……. 19526월 결국 남덕은 일본으로 귀국한다. “가엾은 그이를, 의지할 곳 없는 그 사람을 혼자 남겨두고 떠난다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를 전쟁터에 외톨이로 남겨 둔다는 게……. 이후 한국의 그이는 그림을 곁들인 그림을 일주일에 몇 번씩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큰 위안이었지만 또 그만큼 애절한 것이었지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곤 했지요.”(1986, ‘계간미술’, 유준상의 인터뷰에서) 당시 남덕의 심회(心懷).

 해방 후 아직 일본과의 수교가 맺어지기 전이었기에, 당시 한국과 일본의 왕래는 쉽지 않았다. 19537월 중섭은 선원 자격으로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마사코를 만난다. 마사코의 엄마가 일본 농림장관에게 부탁해 장관 보증으로 일주일 체류를 허가받았다. 네 식구는 히로시마 여관방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중섭은 곧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귀국한다. 마사코도 다시 만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여 통의 편지와 엽서를 주고받으며 중섭 가족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지만,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지쳐, 결국 중섭은 1956년 그는 40살의 나이에 저 언덕을 넘어가 버린 것이다.

▲ 현해탄 (이중섭 作, 1954)
▲ 현해탄 (이중섭 作, 1954)

 

 202195일부터 202236일까지 서귀포시 이중섭 미술관에서는 ‘70년 만의 서귀포 귀향전시회가 열렸다. 이건희 컬렉션 중, 서귀포와 관련된 작품 12점을 전시했다. 무엇보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 단연 인기였다. 하지만 내겐 현해탄이라는 작품이 더 애틋하게 다가왔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믿음과 가족 간의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게 있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전시회에 대한 남덕과 태성의 축사가 걸려 있었다. 남덕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101……! 중섭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2016년에 제작된 사카이 아츠코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Two Homelands, One Love-Lee Joong-seop's wife)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다. “재혼도 하지 않고, 일편단심 당신뿐이었어요. 그랬어요.”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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