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산업은 20세기 초반의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태동했다. 이후 두 대륙은 계속 경쟁을 하면서 항공 산업을 발전시켰다. 진정한 항공의 역사는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날 시작되었다. 인류 최초의 동력비행은 항공 역사의 문을 여는데 충분했다. 항공 역사를 살펴보면, 이에 기여하고 업적을 세운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제일 잘 아는 인물은 앞서 언급한 라이트 형제 일 것이다. 하지만 약 백년간의 항공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은 꽤많다. 그중에서도 항공방위산업을 발전시킨 록히드 형제, 세계 최대 항공기 제작 회사를 만든 윌리엄 보잉, 한국에서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안창남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록히드 형제, 항공방위산업의 발전을 주도하다

▲ 마하2 전투기 F-104 (출처: N.A.R.A)

  록히드 마틴은 세계 항공방위산업 부문에서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방산기업이다. 세계 최고 기업 록히드 마틴의 뿌리는 형제인 앨런 록히드와 맬컴 록히드이다. 이들이 회사를 세우고 훗날 미국 3대 항공우주산업체 중의 하나로 만든 역사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형제는 글라이더 비행장면을 본 뒤 항공기에 사로잡혀 정비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에 비행법을 배운 그들은 1912년에 4000달러를 빌려 알코하이드로 항공기 회사를 세웠지만 바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수차례의 실패를 겪은 형제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P-38 라
이트닝 전투기를 생산하면서였다. 이를 계기로 록히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공군기 제조회사로 떠올랐다. 성공 후에 냉전 종식에 따른 방위산업 시장 축소 위기가 왔지만 생산 혁신과 인수·합병을 통해 극복해냈다. 이때 형제의 회사는 마틴 마리에타와 합병을 했고, 지금의 록히드마틴이라는 회사를 세우게 된 것이다. 1950년대 말, 록히드는 세계 최초로 마하2 전투기 F-104를 개발하는 등 방위 산업을 점차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결국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록히드 형제의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항공 산업과 미국 군수산업의 한 축을 만들어냈다.

  윌리엄 보잉 세계 최대의 항공기 제작 회사를 만들다

▲ 월리엄 보잉 (출처: 워싱턴 대학교 홈페이지)

  보잉은 1903년 시애틀에서 목재회사를 인수한 사업가로 항공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보잉은 1909년 미국에서 열린 첫 에어쇼에서 ‘하늘을 나는 물건’을 본 이후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후 보잉은 비행기를 타보고 싶은 마음에 여러 인재
들을 영입하여 비행기를 직접 만들었고, 이내 항공기제작회사까지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회사 설립 초기에 주문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사재로 연명해야 했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고 보잉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끝나고 또다시 위기가 왔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보잉은 제트여객기 개발에 들어갔다. 이 과감한 투자는 보잉이 에어버스와 함께 세계 민간 항공기 시장을 양분하는 회사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1958년 보잉이 개발한 707 모델을 시작으로 제트여객기 시대가 열렸고, 이내 세계 최대 항공사에 올랐다. 이후에도 보잉은 우주방위 사업체들을 인수하여 상업용뿐 아니라 군사용, 우주항공용 비행기를 아우르는 거대 항공우주 업체로 위상을 높였다.

  안창남, 한반도에서 최초로 비행하다

▲ 최초의 비행을 마친 안창남 (출처: 위키백과)

  위의 인물들과 달리 안창남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국내 항공 산업에 기여한 인물이다. 안창남의 행적에서 그는 목표를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의 삶을 지배할 비행기와의 만남은 그가 16세 때의 일이었다. 1917년 9월 서울 용산에서 열린 미국인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은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전부터도 비행기에 관심을 가져온 그는 이 경험을 계기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비행을 배우다가 어느덧 20세가 된 안창남은 뛰어난 비행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그는 식민지였던 조국의 부름에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왔고, 그의 역사적인 고국 방문 비행은 예고대로 12월 10일에 이뤄졌다. 안창남은 ‘금강호’라고 이름 붙인 1인승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한 뒤 남산을 돌아 창덕궁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했다. 그렇게 안창남은 식민지 조국의 영웅이 되었다. 이후에 안창남은 단순한 비행사에 머물지 않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뛰어난 재능인 비행 기술을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정한 뒤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그는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위의 세 인물은 위기를 딛고 끊임없이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존경받아야할 인물들이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세계 최초, 세계 최고,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었던것이다. 그들의 노력과 도전은 현대의 항공산업 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들은 어느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까지 수없이 많은 실패를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록히드는 작은 2인 기업을 시작으로 항공기 산업을 발전시켰고, 보잉은 전혀 다른 직종에 종사하다가 세계 최대 항공기 제작사를 만들어냈다. 안창남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반도를 최초 비행한 한국인 조종사가 되었다. 이들의 도전이 있었기에 지금의 발전이 있는 것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도 항공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도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우리나라의 미래 항공 산업 발전을 기대하는 바이다.

저작권자 © 항공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