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의 블라디보스토크 날씨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여기에서 우수리스크를 거쳐 하바로브스크까지 둘러보는 것이 이번 여정이다. 본래 이 땅은 만주족의 영토였다. 네르친스크 조약의 결과로 러시아가 이 땅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제정 러시아는 제국의 영토를 확정한다. 블라디보스토크가 ‘동방을 지배하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이 땅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과 좌절로 점철된 회한의 땅이었다. 일제 수탈에 못 이겨 북으로 떠밀려온 고려인은 여기서 마을을 일구고 살았다. 러시아는 뛰어난 농사 기술로 부지런히 일하는 고려인을 환영했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 정부에 의해, 그들은 낯선 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뿔뿔이 흩어진다. 포석(抱石) 조명희는 그러한 내력을 고스란히 안고 여기에서 살다간 작가다.
  1894년 갑오년, 한반도는 변혁과 혼란과 위기로 휩싸여 있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었고,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 포석은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포석은 남다른 정의감과 감수성을 지닌 소년이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던 날,
포석은 담임선생님의 비분강개에 찬 연설을 듣고 눈물을 씹었고, 그 연설을 집에서 고스란히 옮겨 누이들을 울리기도 했다. 절망의 시대 포석에게 빛을 던져준 것은 문학이었다. 빅토르 위고에 심취하며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깨달았고, 막심 고리키에게서 사회의 정의를 배웠다. 그는 평생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1927년 그가 발표한 「낙동강」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문학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 된다. 하지만 포석은 1928년 돌연 러시아 망명길에 오른다.
  조명희 문학비를 볼 수 있을까? 조명희 문학비는 독수리전망대로 오르는 길옆 극동대학 과학박물관 뒤뜰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박물관은 늘 폐쇄되어 있어 들어가서직 접 본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도착했을 때, 박물관 정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문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문이 스르르 밀리며 열렸다. 자물쇠는 그냥 살짝 물려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발길을 뒤뜰로 옮겼다. 문학비의 보존 상태는 엉망이었다. 비석과 기단에는 금이 갔고, 포석의 약력과 시가 새겨져있다는 비석 뒷면의 두 동판은 뜯겨나갔다. 주위도 황량하기 그지없다.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러시아 한인의 처지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굳어졌다.

조명희의 문학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약 3시간을 가면 우수리스크라는 시골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한때 고려인의 작은 터전이었으며, 대륙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신채호, 안중근, 이상설, 홍범도 등이 이곳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포석은 1929년부터 약 6년간 우수리스크에서 작품을 창작 발표하며 교편을 잡고 고려인 교육에 매진한다. 1934년 포석은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하기도 한다. 1935년 포석은 하바로스크로 이주하여 러시아로부터 제공된 ‘작가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로써 포석은 러시아 문단에서도 공식 작가로서 인정받음으로써 러시아 고려인 작가의 비조(鼻祖)가 된다. 아마도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꿈꾸던 사회주의적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곧 깨지고 만다.
  스탈린의 독재체재는 포석과 같은 순수한 사회주의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1937년 포석은 비밀 정부요원에게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다. 1938년 일제간첩혐의로 총살당하고 마는 것이다. 고려인 강제이주정책을 실현하기 전에, 고려인 지도자를 미리 숙청한 것으로 짐작된다.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을 때, 포석은 러시아 땅에서 일말의 희망의 빛을 보고자 했을 것이다. 일제의 극악무도한 행위로인 해 품게 된 인간에 대한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위고와 고리키에게서 보았던 인간에 대한 희망이다. 한때 그것은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스탈린 체재는 그 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고, 그는 처형당했다. 포석은 1956년 후루시초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복권된다. 하지만 그 역시 그가 꿈꾸던 세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스탈린 체제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억의 집
희생자 명단에 기록된 조명희의 이름 (위에서 세 번째)

  우수리스크에서 기차를 타고 야간 침대차를 타고 하바로브스크로 갔다. 하바로브스크 시립묘지 입구에 ‘기억의 집’이 있다. 스탈린 체재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러시아정교 형태의 작은 사원이다. 사원 주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놓고 거기에 4300여 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곳에 포석의 이름도 있다. 포석은 이 시립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찾을 길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시립묘지는 거닐며 오래된 듯이 보이는 이름 없는 무덤만을 유심히 살폈다. 그것들 중 하나에 포석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시립묘지를 나와 아무르강 공원으로 나왔다. 석양이 비치는 드넓은 아무르강(흑룡강)은 하바로브스크를 안고 유유히 흐른다. 바로 이 희생자들을, 아니 여기 이인간들을 모두 위로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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