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제 편집국장

 한 때 <살아남아라! 개복치!>라는 게임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일본에서 출시된 이 게임은 트위터와 같은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고 퍼졌으며, 한국 앱스토어에서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게임의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화면에 나타나는 다양한 먹이를 개복치에게 먹이고, 때로는 모험을 떠나며 개복치의 체중을 불리는 게 전부다. 그러나 흥행의 이유는 단순한 게임 방법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개복치의 ‘사인(死因)’을 찾는 것이었다. 게임 속 개복치는 “두-둥! 돌연사!”라는 알림과 함께 수없이 많은 이유로 죽는다. 바다거북에 충돌하는 것을 예감하고 호흡법을 잃어버려 돌연사, 아침 해가 너무 밝아 놀라서 돌연사, 좋아하는 오징어를 너무 많이 먹어 소화를 시키지 못해 돌연사 등, 제각기 다른 황당한 이유로 죽고 만다. 물론 게임의 재미를 위해 과장된 면도 있지만, 실제 개복치 또한 섬세하고 예민한 생물이라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게임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개복치는 예민하고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생물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이 게임이 문득 생각난 것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때로는 집단이 하나의 거대한 개복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쉽게’ 타인을 배척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사소한 것에도 분노하며 심지어는 상대방을 ‘혐오’하는 그 모든 것들이 깊은 고민이나 생각 끝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짧은 순간에, 한 마디 말로 이루어진다는 게 마치 개복치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 혹은 집단의 ‘개복치화’가 가장 잘 일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정치판’이다. 그곳에서는 개개인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위해 싸우고, 집단은 때로 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들이 속한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싸운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해를 입히려는 상대방이 보이면 즉시 칼을 빼어들고 상대방의 목을 겨눈다. 나와 생각이 다른, 내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마주치는 경우에도 개복치들은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한다. 이 현상은 비단 정치판의 최전선에 서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어떠한 집단을 옹호하는 지지자들 또한 개복치화가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의 경우만 해도 보수와 진보는 끝없이 자신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며,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고 ‘나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치부한다. 상대방이 내가 지지하는 특정인을 (혹은 그의 발언을) 공격할 때면 순식간에 그들에 대한 혐오스러운 표현을 쏟아 붓는다.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짧게 스치는 표정에도 쉽게 분노하는 이 곳. 이곳에 이해란 없다. 공감이란 없다. 공존이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복치들의 사회를 보다 덜 예민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미국의 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한 강연에서 미국의 분열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가장 좋은 것은 공감하기 어려울 때 공감하는 겁니다. 상대방에게도 옳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인정을 바탕으로 말을 꺼내는 것이죠.” 그렇다. 나의 옳음의 기준과 상대방의 옳음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정서적 공감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면 우리는 서로를 예민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생산적인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성을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건 그다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감성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이성은 이를 변호하는 쪽으로 흘러가기에 이미 이성과 감성의 구분이 사라진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오히려 대화의 단절을 불러올 수도 있다.

 스마트폰을 들어 뉴스를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의 충돌이, 한 개인과 또 다른 개인의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충돌과 갈등을 보며 누군가의 편에 서서 예민한 눈초리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는 게임 속 개복치와 같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개복치.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욱 섬세하게 이해해야 한다. 때로는 이성적이고 날카로운 접근보다는 정서적인 공감이 상대 개복치의 마음을 더 따스하게 보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개복치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행복한 개복치들의 사회’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항공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