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지 정확치는 않다. 어떤 책자에 실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작품 「불이선란」을 처음 보았을 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딜레탕트의 분방한 마음으로 미술 감상을 즐기는 편이지만, 추사의 작품을 대하면 늘 난감해진다. 그 대범하고 활달한 붓질에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이모저모 따져보고, 추사 전문가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보아도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때때로 속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추사 작품 중 진위(眞僞) 논란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이선란」을 보았을 때는, 따져볼 것도 없이 그냥 큰 울림이 있었다. 말 그대로 스탕달신드롬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보아도 역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번쯤 「불이선란」 진품을 보고 싶었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 진품은 본 적이 있다.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 들렀을 때, 운 좋게도 「세한도」 진품을 볼 수 있었다. 「세한도」를 소장하고 있던 분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그것을 기탁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공간이 부족해서 박물관 소장품들을 교체 전시하기 때문에, 특정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 「세한도」가 추사의 대표작이기는 하지만, 진품 보기를 목말라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이선란」은 진품을 꼭 보고 싶었다. 진품 원본에서만 우러난다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 그런데도 「불이선란」 진품은 보고 싶었다.

 헌데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불이선란」은 좀처럼 공개되지 않았다. 언젠가 전시 소식을 들었지만, 정보에 어두운 내 귀에 그 소식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전시가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불이선란」을 전시한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소장자 손창근 선생이 이 작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번 손 선생의 기증품 목록에 정선, 심사정, 김득신, 장승업 등의 작품이 올라 있으며, 최초의 한글 서적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년)도 포함되어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세한도」를 기탁한 분도 다름 아닌 손창근 선생이다. 아버지 손세기 선생으로부터 대를 이어 수집한 문화재를 여러 차례 기탄없이 내놓았다. 두 분의 깊은 뜻에 고개가 숙어질 따름이다.

 한숨에 달려가 「불이선란」을 마주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원본을 보았을 때 작품 크기가 생각보다 작다고 여겼는데, 꼭 고만한 크기다. 벽면 하나에 조명을 받고 걸려 있어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난(蘭)은 난이되 맵시 있는 난은 아니다. 날카롭지도 않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힘차다. 난을 쳤다고 하지만, 흐린 먹빛으로 쳐서 차라리 배경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도리어 글씨가 도드라진다. 비뚤배뚤한 것이 어린아이 글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항우도 감당 못할 힘이 서려 있다. 도드라진 꽃술이 글씨와 호응한다. 지면의 화려한 배색 위에 소박한 난이 그림자처럼 떠있고, 투박하면서도 힘찬 글씨가 난을 두르고 있다. 부드러움과 거침, 화려함과 소박함, 드러남과 감춤이 교차된다.

 추사는 글씨도 신필이지만, 난(蘭)을 치는 데 있어서도 이품(異稟)을 지닌 예술가다. 「불기심란도(不欺心蘭圖)」나 「증번상촌장묵란(贈樊上村莊墨蘭)」도 좋지만, 역시 「불이선란」이 으뜸이다. 신품(神品)이라고들 한다.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에서 이동주 선생은, 그림과 글씨와 글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추사의 작품이 좋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그러한 특징을 적절히 담고 있어 신품이라고 한다.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노쇠한 한 인간의 초탈한 마음이 더해져서, 이 작품은 저 언덕 너머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확한 창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상 「불이선란」을 추사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추정한다.

 그림 위에 적혀 있다.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 우연히 천성을 담았네. 문 닫고 깊숙이 처해 찾으니,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 누군가 이를 들어 다시 (그리기를) 강요한다면,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침묵으로 답하리.」 이로 인하여 이 작품을 「불이선란」이라 부른다. 유마거사는 인도의 비야리성(毗耶離城)에서 속인이면서도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 󰡔유마경(維摩經)󰡕의 핵심은, 유마거사와 보살들의 문답 사이에 펼쳐지는 ‘불이(不二)의 법문’에 담겨있다. 생기고 사라짐이 둘이 아니며(生滅不二),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衆佛不二)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은 유마거사에게 불이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침묵으로 답할 뿐이다. 부질없이 「불이선란」에 말을 보탰다. 직접 가서 보길 바란다.

▲ 손세기&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손세기‧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3월 24일까지 열린다. 여기에서 추사의 다른 글씨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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